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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1
1983년 봄인 것으로 기억한다. 너무도 오래 된 일이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 친구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지 3년이 지났고 집안 형편은 정말 말 그대로 형편없었다. 맘껏 먹지는 못하지만 그나마 하루 세끼를 먹는다는 것에 큰 행운으로 여기며 고등학교를 다녀야 하는 상황이라 그리 맘 편하게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것 같았고, 공부에도 마음을 잡지 못해 방황하던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아마도 그 때가 5월 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수업을 하고 있는 그 친구를 담임선생님께서 부르시더니 다음날부터 교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1분기 수업료가 납부되지 않아 학교에 등교를 해도 결석으로 처리되고 교실에서 수업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도 겨우 학교에 다니는 형편이지만 그 친구를 생각하니 정말 마음이 아팠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원망하고 힘들게 가정을 이끌어 가시는 어머니를 원망하고 학교를 포기하면 어쩌지?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교실 복도에서 선생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는 친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며칠 동안 지켜보던 반 친구들이 학급회의를 열어 그 친구의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한 회의를 하였고 결국 모금운동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학급 친구들도 그리 넉넉한 친구들이 많지 않아서 수업료를 마련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는데 이런 소식을 들으신 담임선생님께서 나머지 부족한 금액을 해결해 주시기로 하였다. 드디어 그 친구가 교실에서 함께 수업을 받게 된 날 학급 친구들은 모두 밝은 표정으로 친구를 환영하였고 그 친구는 환한 웃음으로 화답을 하였다.
그 이후 그 친구는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위해 토끼를 키우고 틈틈이 주변의 일손을 도우면서 자신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열심히 공부한 결과 서서히 성적이 오르기 시작하였고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는 전교 10등 이내의 성적으로 원하던 대학에 진학하였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아르바이트를 통해 자신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고자 최선을 다 하는 그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그때 학급 친구들과 담임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또, 매번 그런 도움을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을 해보았다. 친구들과 선생님의 도움을 바탕으로 스스로 노력하는 그 친구의 태도가 자신의 미래를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한 번의 도움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게 되었으니 ‘나눔의 행복’이 아닐까 한다.
이후 그 친구는 아르바이트를 통해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여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고 지금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으며 가정 형편이 어려운 제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항상 노력하는 멋진 선생님이 되었다.
#. 이야기2
지인들과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를 방문했던 적이 있다. 캄보디아의 역사 깊은 유적지인 앙코르와트를 방문하기 위해 베트남에서 씨엡립을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도착한 시간은 한 밤 중 이었다. 불빛이 별로 보이지 않는 씨엡립 공항을 보면서 다소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안정을 찾고 숙소에 도착하여 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아침식사를 하고는 창가로 보이는 캄보디아 인들의 생활모습을 살펴보았다. 학생들은 일찍 등굣길에 나서고 있었으며 커다란 도로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뭔가를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숙소 밖으로 나와서 살펴보니 도로를 중심으로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고 건물의 뒤편에는 나무들이 무성한 모습을 보면서 이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느껴졌지만 이내 그렇게 생각한 내가 무색하리만큼 사람들의 표정은 너무나도 행복한 표정들이었다. 비록 초라한 옷차림과 좋은 자동차는 없었지만 녹이 슨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너무 행복하다는 모습이었다.
숙소를 떠나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앙코르왓에 도착하였다. 앙코르왓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과연 이것이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유적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저곳을 살펴보면서 궁을 살펴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4~5세 정도의 여자 아이가 따라오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인가보다 라고 그냥 흘려보냈는데 한 참을 가다보니 뒤 쪽에서 들여오는 소리가 있었다.
“ One Doller! ", " One Doller! Please"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돌아보았더니 우리 나라 관광객으로 보이는 할아버지 할머니께 손을 내밀면서 구걸하고 있었다.
워낙 정이 많은 분들인지 그 분들은 천 원짜리 지폐를 손에 쥐어주면서 “에이구, 불쌍한 것!”하며 마음 아파 하셨다. 천원 지폐를 받아든 소녀는 어디론가 뛰어갔다.
한 참이 지나서 어디 선가 한 무리의 아이들이 나타나면서 우리 주변으로 몰려와 또 다시
“One Doller!", "One Doller! Please"를 외치면서 졸졸 따라 다니는 것이 아닌가?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마음 약한 분들은 그 아이들의 손에 1달러 또는 우리 천원 짜리 지폐를 주었다.
드디어 나에게도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아이가 있어 막 지폐를 꺼내려는 순간 함께 간 가이드가 “선생님! 주지 마세요!”하는 것이었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뭐 작은 돈인데 주지 마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더니 가이드가 내 손을 잡아끌고 구석으로 향하였다.
“저 아이들은 지금 부모의 강요에 의해 돈 벌이에 나서는 아이들입니다. 부모들은 일하지 않고 아이들을 저렇게 관광지로 내보내 돈을 구걸하게 하지요.”그러더니 이내 내게 질문을 하였다.
“이곳 캄보디아 성인 하루 임금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바로 1달러 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선생님께서 돈을 주신다면 저 아이들의 미래는 없습니다. 비록 오늘은 행복하게 먹을 수 있겠지만 내일이면 또 다시 이곳에서 구걸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습관이 되고 결국 그 아이들은 관광객을 만나지 못하게 되면 일을 하지 않던 습관이 남아 결국을 굶어 죽는다고 합니다. 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굶어 죽는 것을 원하시면 돈을 주시고,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배낭 속에 있는 먹을 것을 주십시오.”
나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 배낭 속의 빵을 자그마한 여자 아이의 입에 떼어 넣어 주면서 나에게는 아주 작은 돈이라고 할 수 있는 천 원이 이들에게 하루를 즐겁게 살 수 있는 달콤한 사탕이 될 수는 있겠지만 평생을 불행이라는 굴레 속에서 살아가도록 독약을 주려고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 거렸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는 조상들의 말씀처럼 다른 사람들과 무엇인가를 나눈다는 것은 정말 신나고 행복한 것이다. 물론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마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받는 사람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주는 사람의 입장만 생각해서 나눔을 실천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연말이 되면 사진을 남기기 위해 형식적인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보다는 일상생활에서 묵묵히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우리 사회가 더욱 풍요로워지고 더욱 행복해 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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